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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전태국 ADeKo Awards 2025 공공부문 수상자 - 사회학화 명예교수 (강원대)

2025-02-21
조회수 410


전태국, 2025 ADeKo Awards 공공부문 수상자, 강원대학교 사회학화 명예교수와 인터뷰


전태국은 2025 ADeKo 공공상 수상자입니다.
전태국의 훌륭한 업적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인터뷰 형식으로 전태국과 전태국의 업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ADeKo: 간단한 자기소개를 적상해주세요

전태국: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서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Dr.Phil)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에모리 대학교,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 함부르크 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했으며, 한국사회학회 회장, 한독사회학회 회장,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전문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이다.


주요 저서로 『대전환의 시대, 독일의 제도와 정책』(공저, 솔과학 2023), 『배제와 통합: 탈북인의 삶』(공저, 진인진 2019), 『독일의 사회통합과 새로운 위험』(공저, 한울, 2017), 『지식사회학. 지배. 이데올로기. 지식인』(사회문화연구소, 1994; 3, 한울, 2013), 『탈주술화와 유교문화』(한울, 2013), 『사회통합과 한국 통일의 길』(한울, 2013), 『독일 통일과 동독 권력엘리트』(공저, 한울, 2011), 『현대 한국사회의 이해』(공저, 강원대학교출판부, 2002), 『민족통일과 사회통합』(공저, 사회문화연구소, 1999), 『국가사회주의의 몰락』(한울, 1998), 『탈현대사회사상의 궤적』(공저, 새길, 1995), 『한국사회의 비판적 인식』 (공저, 나남, 1990), 『사회주의의 이상과 현실』(공저, 강원대학교출판부, 1988), 『현대자본주의와 공동체이론』(공저, 한길사, 1987) 등이 있다.


학문적 여정과 사회학에 대한 열정

전태국 교수님, 교수님은 한국과 국제 사회에서 사회학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해오셨습니다. 사회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으며, 독일 유학 이후 학문적 여정은 어떻게 발전해왔나요?

<사회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

되돌아보면 저의 소시적 경험이 전공 선택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중학생때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이튿날 부친이 쿠데타 세력에 의해 부산 육군형무소에 붙잡혀 갔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육군형무소 철조망 저편에 아버님의 모습을 보려고 갔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일은 저에게 군부독재의 상징처럼 기억되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일본에서 성장했습니다. 거기서 초,중등학교를 다니셨고, 대학을 졸업하셨습니다. 해방후 한국에 오셔서 고교 교사를 하시던 중 4.19후 결성된 교원노동조합의 부산시 부위원장을 맡아 교원운동에 앞장서셨습니다. 이 일로 붙잡혀 가신 아버님은 그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셨고, 1년 후 석방되셨습니다만 학교에서 파면 당하셨습니다. 고교 1학년 때의 기억도 생생합니다. 하루는 집 마당을 비로 쓸고 대문 밖 주변을 쓸려고 나갔다가 대문 기둥에 걸려 있던 부친의 문패가 바닥에 떨어져 깨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부서진 문패 조각을 부친께 보여드렸더니 새 문패를 달아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바로 그때 장총을 어깨에 맨 경찰관이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어디로 이사 가시려하느냐며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고 경고를 주고 갔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제가 대학원생일 때,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부친이 요시찰대상에서 제외됨을 알린다는 편지가 부친께 왔습니다.

 

국가의 폭력성을 절감케 한 소시적의 이러한 경험은 어린 나에게 사회에 대한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 차게 하였습니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무엇보다 커졌고 이 방면에서 큰 사람이 되고자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치르는 적성검사에서도 일부러 이 방면에 소질과 경향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도록 응답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학입시를 앞둔 고교 3학년의 중요한 시기에도 비분강개와 사회정의에 불타서 정치집회에 열심히 참가하였습니다. 어머님이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등교는 안하고, 당시 유명 정치가들(곽상훈, 박순천, 김영삼)이 벌이는 시국강연장인 초등학교 운동장 바닥에 앉아 연설을 열심히 듣기도 하였습니다. 또 당시 정부가 추진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소시적 경험이 사회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국가권력이 개인의 삶을 마구 뒤흔드는 비뚤어진 사회에서 입신출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이 존중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앞장 서는 큰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포부를 실현하는 데 적합한 학문은 어떤 것이 있는가 열심히 사전을 찾아 보기도 하고 부친의 조언도 들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학문은 사회학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법학과 정치학은 출세하는 학문, 경제학은 부자가 되는 학문이라 생각했고, 사회를 바꾸는 학문은 바로 사회학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엘리트의 자부심에 가득찬 저는 국가와 민족의 지도자 되기 위한 자질을 함양하는데 나름대로 정진하였습니다.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회변혁의 의지에 불타고 있었고, 연구관심도 사회변혁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사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사회 변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는가, 사회혁명의 성공과 실패는 무엇에 기인하는가 등 평소에 품었던 관심들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학과의 교수님들은 제 연구관심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대학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책을 읽었습니다. 대출이 되지 않는 책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과거 경성제국대학 도서들이 풍부하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시절, 정치상황에 항의하는 시위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하였습니다. 대학 입학 하자마자 68부정선거규탄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고, 대통령 3선 연임을 위해 헌법 개정을 획책하는 것에 반대하는 3선개헌반대투쟁에도 가담하였습니다. 또 학내 이슈로 문리과대학의 3(종교학과, 미학과, 철학과) 통폐합에 반대하는 시위에도 가담하여 동대문 경찰서에 붙잡혀가 즉결재판에 회부되어 벌금을 물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일간지에 제 이름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또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여러 번 제 옆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1학년 신입생일때 친구의 권유로 한 서클에 가입했는데, 당시 경제학과를 8년째 다니는 선배가 우리를 지도하였습니다.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등을 읽고 토론하며 대학생활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시무시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발표되면서 그 선배가 공안당국에 붙들려가 장기간의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2학년때는 존경하는 학과 교수님께서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구속되는 사건을 목도했습니다. 당시 학과 교수님들 중에서 유일하게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던 황성모 교수가 동베를린사건과 학생서클 민족주의비교연구회사건과 관련하여 중앙정보부에 붙잡혀가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생 때는 저를 포함하여 많은 학과 친구들과 선배가 보안사령부에 붙들려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른바 ‘학원간첩단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한 열흘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만, 재판정까지 갔다가 풀려난 친구와 선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돈의 외풍 속에서도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밤을 낮 삼아 독서에 몰두하던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한글로 쓰인 책이 별로 없어서 주로 일본어로 된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어를 잠깐 따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일본어로 쓰인 책을 읽다가 파악이 어려우면 아버님께 물어보곤 했습니다. 부산에 계신 부친께 편지로 물으면 아주 기뻐하시며 자상하게 해설을 덧붙여 답 글을 보내주시곤 하셨습니다

 

학생시절 탐독했던 책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Max Weber ‘The Religion of China’, Karl Mannheim <Ideologie und Utopie>, Ralf Dahrendorf ‘Class and Class Conflict in Industrial Society‘, C. Wright Mills ‘The Sociological Imagination’, Joseph A.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Reinhard Bendix Max Weber 등의 서구책과 일본인 학자가 쓴 <사회사상사개론>(다카시마젠야 외), 일제시대 한국인 학자가 일본어로 쓴 <조선사회경제사>(백남운), 그리고 해방 후 서울대 교수가 한글로 쓴 <근세사회사상사>(최문환), <민족주의의 전개과정>(최문환), <현대사회사상사>(황성모) 등입니다

 

학생 때 학문적으로 아버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공부 잘한 친구가 대학 졸업후 잘나가는 삼성에 취직하자 저도 그렇게 진로를 정할까 생각하고 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사기업에 들어가는 것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진로를 찾아보라는 말씀에 기업 취직은 포기하고 계속 공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헌책방에서 일본어로 된 사회학 책을 구입하여 아버님께 보여드렸더니 자신이 대학생 때 보던 책이라며 반가워 하시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당시 아버님께서는 저에게 일본어 번역본 보다는 독일어 원문을 읽을 것을 권하셔서, 충무로에 있던 풍전제과 위층의 독일책 전문서점 소피아를 열심히 드나들기도 했습니다. 책값이 비쌌지만, 접하기 어려웠던 독일 사회학 책을 구입할 때 얼마나 기뻤는지 그 때의 그 기분은 지금까지도 저의 연구생활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데이트 코스로 독일책, 영어책, 일본책 등 해외서적을 전문으로 팔던 서점들을 수시로 순회했던 덕분에 저는 지금의 집사람과 결혼하는 행운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대학생 시절, 특히 독일사회학자 마르크스와 베버의 이론에 심취하였습니다. 저에게 세계를 이해하는 시각과 사회학적 상상력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교정의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헤겔과 맑스를 논하며 때로는 감동을 주고 받고 격렬한 논쟁도 하면서 학문에의 열정으로 뜨거운 대학생활을 보냈습니다. 난해한 독일어 문장에 봉착해 물어볼 데가 없었습니다. 교수님들은 모두 독일 사회학에 까막눈이었고, 동료 친구들 중에서 저만큼 독일사회학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혼자서 고군분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되돌아보면 두가지 일이 뇌리에 생생합니다

하나는 베버에 몰두하게 된 일입니다. 대학원 시절 어느 일요일 제가 펠로우로 일하던 인구 및 발전문제 연구소에 와서 베버의 객관성논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연구소장이신 이해영 교수님께서 연구소에 들리셨다가 제가 책을 보고 있는 것을 보시고 저를 불러서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버를 읽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앞으로 베버의 저작을 읽고 매주 내용을 요약해 보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교수님의 격려에 힘입어 열심히 베버를 읽었습니다. 베버 저작에 몰두하는 저를 두고 친구들이 전스 베버라고 별명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학생때 시작된 독일사회학 지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의 학문생활을 지배하고 있으니 인생은 결코 긴 것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다른 하나는 귀중한 독일 잡지를 접한 일입니다. 학과의 황성모 교수께서 구금되어 재판 중이어서 연구실이 장기간 비어 있었습니다. 연구실 서가 한편에 여러 독일 잡지가 꽂혀 있었습니다. 모두가 경성제대 도서관 장서였습니다. 저는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참고문헌에서만 보던 독일 잡지 원본을 눈앞에 본 것입니다. ‘Die Gesellschaft’, ‘Die Internationale’, ‘Unter dem Banner des Marxismus’ 등이 결본없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이 잡지들 중에서 몇개의 글을 골라 읽느라 애먹은 기억이 납니다

 

베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에도 심취했습니다. 마르크스를 처음 접한 것은 학부생 때였습니다. 당시 종로에는 영어 원서를 취급하는 큰 서점이 몇 군데 있었는데, 당시 나는 시간이 나면 자주 들러 학문의 최근 추세와 유행을 파악하려 했습니다. 한번은 영어로 쓰인 한 철학책의 말미에 공산당 선언》이 실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공산당 선언》은 불온서적 1호로 기피되었던 문헌입니다. 호기심에 얼른 거금을 주고 그 책을 구입했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지만 들인 돈이 아까워 열심히 읽었습니다. 또한 종로에는 일본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도 있었습니다. 서점 주인은 제가 가면 좋은 책이 있다며 2층에서 따로 가져와 보여주었습니다.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 등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제 서가에는 그때 구입하여 손때가 묻은 책들이 꽂혀 있어 저의 기억 왕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 친척 아저씨 집에서 일본어판 자본론』을 빌려 읽었습니다. 일제시대와 자유당 시대에 판사를 지내셨던 아저씨 집에는 장서가 많았습니다

 

독일 사회학에 전념한 저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의 석사논문으로 Karl Mannheim의 지식사회학에 대해 썼고 논문 요약문은 독일어로 썼습니다. 석사 후 독일 유학을 꿈꾸고 있었는데, 마침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 재단(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Stiftung)의 장학생으로 선발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저의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당시 다니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를 사직하고 일약 독일 유학을 떠났습니다. 유학 시절 실로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동독에서 출판된 마르크스의 저작(MEW)이 서독의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동독에서 제조된 카메라 Praktica가 서독에서 버젓이 판매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지도교수 Prof. Dr. Jürgen Ritsert가 기초지식으로 반드시 읽어야 할 문헌 리스트를 작성해 주었습니다. 헤겔, 마르크스, 루카치,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의 저작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대학 도서관에는 국내외의 다양한 학술지들이 비치되어 있어 최근의 연구동향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고, 뜨겁게 논쟁되는 이슈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FAZIT 재단의 장학금은 저에게 난생 처음으로 생활비 걱정없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습니다. 풍부하게 개설되어 있는 다양한 테마의 강의에 출석하고, 틈틈이 유럽 여행도 하면서 서구 문물의 진수를 맛보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논문 일부를 작성하여 교수님께 제출하면 논평을 달아 주시어 논문 진척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 제 생각을 유려한 독일 문장으로 다듬는데 독일 친구가 도와주기도 하였습니다. 마침내 1984년 6월 29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학과에서 Disputation을 통과하여 magna cum laude의 종합성적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박사학위논문의 제목은 “Karl Mannheims Ideologietheorie und ihr Verhältnis zur kritischen Theorie der Frankfurter Schule” 입니다

 

<독일유학 이후 학문적 여정>

학위 취득 후 이태리 여행을 마치고 바로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강의하였습니다. 교수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던 중 국립대학인 강원대학교의 총장의 부름에 응하여 교수로 특별 채용되었습니다. 정년퇴직할 때까지 강원대에서 계속 봉직하였습니다

 

강원대학교에 봉직하면서 동시에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에 출강하여 마르크스와 베버에 대해 강의하였습니다.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특히 『독일 이데올로기』와 『자본론』에 역점을 두어 강의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대학에서 마르크스의 독일어 원전에 기반한 강의는 역사상 처음이었기에 학부는 물론 대학원 수업에서도 수강생들로 교실이 가득 찼었습니다. 그때 만난 제자들과 의기투합하여 작은 연구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널리 퍼져있던 이른바 정통파의 부가물과 축약에서 벗어나서 마르크스의 원전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입니다. 모임의 이름을 마금모라고 작명하였습니다. 마르크스를 금요일에 읽는 모임이라는 말이지요

 

당시 한국의 사회학계는 반공주의가 병독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특히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혁명이론으로, 심지어 주사파병원균으로 보는 소름끼치는 무지가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서구에서 마르크스는 레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뇌옥으로부터 해방되어 때로는 프로이트와 때로는 막스 베버와 결합되어 논의되었고, 자유롭고 인간적인 이성적 사회에 대한 관심은 마르크스의 르네상스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그동안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사상 통제로 인해 마르크스가 자유롭게 연구되지 못하고 기피되는 상황에서 레닌주의적으로 곡해된 단편적인 주석들이 젊은 지성을 사로잡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편견과 얼치기 지식을 낳고 보급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인양 떠드는 통속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거리를 두고자 하였습니다. 마침내 마금모는 언론자유를 주창한 청년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을 번역하기로 하였습니다. 반공주의 풍토 속에서 금기시되었던 사상의 본래의 텍스트 안에 실제로 무엇이 읽혀질 수 있는가를 알고 싶어하는 독자의 정보욕구에 답하고자 한 것입니다. 오랜 작업 끝에 드디어 마르크스 초기저작: 비판과 언론』(열음사, 1996.3) 이 출간되었고 곧이어 출판기념회를 열었습니다. 1996년 5월에 서울 동숭동의 출판사 강당에서 열린 기념회에는 이효재 교수님, 고영복 교수님, 차인석 교수님이 축사를 해주셨고, 김대환 교수님과 정문길 교수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해주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저작을 갖고 서울 한복판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진 것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아마도 처음일 것입니다

 

또한 일단의 이화여대 출신의 여성 사회학자들에게 마르크스를 강의하였습니다. 이화여대 이효재 교수님이 정권에 의해 강제 해직 되었을 때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아현동에 마련한 여사연’(여성한국사회연구회)에서 『독일이데올로기』를 강독하는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참석자들은 모두 여성사회학자와 여성운동가들이었습니다. 모두 마르크스의 뛰어난 문장력에 탄복하며, 그의 사회이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토론에 즐겁게 참여하였습니다. 참석자 중에는 후에 국회의원, 장관으로 진출한 이도 있었습니다

 

저의 연구 여정에 새로운 획을 긋는 행운이 찾아 왔습니다. 1992년에는 LG연암문화재단 해외연구교수로 선발된 것입니다. 덕분에 동유럽 사회주의권 국가의 체제전환 과정에 대해 연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전체주의적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냉전을 종식시킨 전대미문의 세계사적 변화에 대해 사회학자로서 관심이 컸습니다. 동독, 체코, 헝가리, 폴란드를 여행하며 체제전환 과정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예전 독일유학때 지도교수였던 Jürgen Ritsert 교수께서 저의 연구계획을 들으시고 도움을 받을 학자들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1992년 겨울에 만난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Rainer Deppe 박사는 동구변혁 일반에 대한 탁월한 식견으로 저의 연구계획에 실질적인 조언을 주었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헝가리 과학아카데미의 József Bayer 박사는 루카치 이후의 헝가리의 지적 상황 전반과 민주화 과정에 대해 상세한 안내를 해 주었습니다. 1993년 봄 폴란드 포츠난 대학의 연구실에서 만난 Nowak 교수는 폴란드의 개혁상태에 대해 생생한 증언과 체계적인 조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 여름에 독일 뉘른베르크 대학에서 열린 한독사회학자 회의에서 만난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Karin Lohr 박사는 동독사회학의 발전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한 논문 을 보내왔습니다. 이런 여러분의 증언과 체계적인 조망에 힘입어 마침내 독일통일과 체코, 헝가리, 폴란드의 체제전환 과정을 연구한 『국가사회주의의 몰락』 (1998)을 출간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해외발표를 위해 많은 나라들을 여행했습니다. 독일은 물론이고 미국, 일본, 중국, 폴란드, 이태리, 심지어 자마이카까지 발표하러 갔습니다. 한국사회의 역동적 변화를 여러 측면에서 분석한 글들을 발표하고 외국학자들과 토론하는 즐거운 학문’ (fröhliche Wissenschaft) 을 만끽하였습니다

 

또 학회와 대학에서 공식적 직책을 맡아 다양한 주제의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초청강연회를 여는 데 앞장 섰습니다. 대표적인 것을 몇가지 들면

(1) 2007년에 한국사회학회 회장으로서 “Diversity and Dynamics of Globalization: Socio-Economic Models in Global Capitalism”라는 주제로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독일, 프랑스, 덴마크, 프랑스, 폴란드, 호주, 일본, 멕시코, 필리핀에서 온 10명의 해외학자와 다수의 국내학자들이 참가하여 세계화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2) 2009년에 한독사회학회회장으로서 통일 전후 동독 엘리트의 사회적 지위 변화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재단과 통일부의 후원을 받아 개최하였습니다. 체제전환과정을 직접 체험한 동독학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3)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서 1997년에 북한 황장엽의 망명을 계기로, 강원도 각 시군(춘천, 양구, 가평, 홍천, 인제, 화천)의 통일정세보고회에서 황장엽 망명과 한반도 통일라는 주제로 강연하였습니다.  

 

정년 후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강의 기회를 얻은 것은 저에게 큰 영광이었습니다. 강의실을 메운 금발의 학생들이 현대 한국의 경이적인 발전의 뒤에 어떤 힘이 작용하였는가를 진지하게 질문하며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한국인 학자로서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한국의 문화나 예술 또는 음식에 대해서는 알려질 기회가 비교적 많았지만, 정작 사회학적 분석은 제시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의의 주된 테마는 한국의 성공과 유교문화의 관계였습니다. 출발점은 베버의 유교 연구였습니다. 베버는 유교문화권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의 체계적 틀을 최초로 제출하여 학자적 탁월함이 인정되지만, 베버가 놓치거나 잘못 해석한 부분이 없지 않음을 제시하고, 베버가 발전의 장애요인으로 여겼던 요인들이 한국에서 오히려 발전의 촉진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논증하는 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또 하나의 영광스러운 일은 70세가 넘은 나이에 학자로서 그동안 살아온 삶을 시민들에게 고백하는 기회를 가졌던 일입니다. 2019년에 네이버 문화재단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의 초청을 받아 학문과 그 사회적 의미: 학자의 삶이란 제목으로 시민들에게 강연하였습니다. 미흡하나마 내적 헌신에 충실하고자 애썼던 한 학자의 삶을 제시했습니다. 연구보다는 감투를 흘금거리고, 유녕하여 출세의 기회를 잡고자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그들에게 학문은 즐거운 학문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입니다. 그들은 학문하지 않을 때 행복을 느끼고 학문에 몰두할 때 불행을 느낍니다. “불현듯 떠오르는 예감에 소리 높여 외치는 환호성”(니체)의 즐거움을 누리는 학자의 삶을 자부해 보았습니다.


교수님의 연구는 지식사회학, 사회통합, 한국의 통일 등 다양한 분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개인적인 경험들이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말씀해 주세요.

학생 때 은사 고영복 교수님께서 Karl Mannheim에 대해 강의하셨는데, 그때 감명받아 그 후 지식사회학을 전공 분야로 파고들게 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을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에 대해 썼고, 그후 프랑크푸르트대학교 박사학위논문도 만하임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의 관계에 대해 썼으니, 지식사회학이 저의 전공분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걸핏하면 빨갱이란 말이 난무하고,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을 불순 세력‘, 정권에 비판적인 책을 불온서적등으로 낙인 찍는 음울한 정서가 한국사회를 오래동안 지배해 왔습니다. 이 불순이나 불온이란 말은 과거 일제가 조선인 중에서 자신들의 명령이나 지도를 따르지 않고 반항하는 조선인들을 지목하여 ‘불령선인이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 말이라 생각됩니다. 남북 분단과 좌-우 이념대결 속에서 사람을 적-우로 구분하는 갈라치기정서가 만연하는 까닭을 밝히고, 사회 체제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지배사상이 지배집단의 특수 이익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지식사회학은 이 시대가 요청하는 학문이라 생각하고 그 매력에 빠졌습니다

 

만하임에 의해 정립된 지식사회학은 존재구속성‘(Seinsgebundheit)의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계급 구성원은 자본가이든, 노동자이든 그들은 자신의 계급 이익에 사로잡혀 편향된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오직 비계급적 존재만이 편향되지 않은 객관적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보고, 그의 유명한 자유로이 떠도는 지식인‘ (freischwebende Intellektelle)을 정식화 했습니다. 지식인에게 너무나 어두운 밤의 파수꾼’(Wächter zu sein in einer sonst allzu finsteren Nacht)이라는 사명을 각성시킨 것에 감동되어 만하임에 푹 빠졌습니다

 

사회통합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97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당시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으로서 북한 급변사태시 남북한 사회통합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독일의 경험에 의거하여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 결과를 한국통일의 사회통합적 전망과 과제라는 글로 다듬었고, 1999년에한국사회학회가 득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과 함께 베를린장벽 붕괴 1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한-독 특별심포지엄에서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이글은 2000년에 독일 뉘른베르크 대학에서 개최된 제4차 한독사회학자 회의에서 독일어로 발표했습니다. 통일은 체계의 통합만으로는 외적 통일에 그치고 만다는 것을 독일이 통일 후 겪고 있는 사회갈등을 접하면서 절감하게 되었고, 한국통일은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아야겠기에 통일을 순수하게 기술적-경제적 과정으로만 간주하는 잘못된 길에 대한 조기경보를 울리고자 했습니다. 사회통합에서 중요한 것은 이질성의 퇴치라는 획일적 자세가 아니라 북한의 문화적 이질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열려 있는 다원주의적 자세라고 확신합니다

 

남북한 사회통합을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문제는 북한사회화의 효과입니다. 오래동안 봉건적 사회주의에 길들여진 북한 주민들이 남북한 사회통합 과정에서 순조롭게 적응할 수 있을까? 두가지 시각이 가능합니다. 체제의 각인이 깊이 내면화되어 통일 후에도 쉽사리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사회화론과 체제의 각인이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함께 상대적으로 급속하게 변화될 수 있다고 보는 상황론입니다. 저는 상황론을 지지하여 체제의 각인에 의한 가치관 상이는 사회통합을 불가능하게 할 만큼 본질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통일 후 북한주민들이 겪을 탈가치화가 사회통합을 어렵게 할 것이라고 봅니다. 통일 후에 북한주민들이 경험할 기형화와 비대칭적 인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사회통합의 핵심적 과제로 대두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사회국가를 충실하게 건설하는 것이 남북한 사회통합의 사회적 기초를 확립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학적 도전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며, 교수님의 연구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요?

현재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도전 과제는 종북좌빨수구꼴통이라는 프레임으로 벌어지는 이념갈등입니다.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이 갈등이 더욱 첨예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이념갈등은 논쟁의 능력을 상실하고 순전히 짐승 의식의 수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자신의 진영을 옹호하는 주장이면 무조건 옳고적대자의 주장은 무조건 틀렸고, 적대자의 주장과 친화성이 있어도 틀린 것으로 배척됩니다. 보수의 진영에 있는가 아니면 진보의 진영에 있는가좌파의 진영에 있는가 아니면 우파의 진영에 있는가 하는 점만이 주목됩니다. 인권과 사회정의의 시각은 닫혀 있고 윤리의식도 부재합니다. 상대방의 주장을 내적으로 음미할 사유능력이 마비되어 있다는 점에서 짐승’ 수준의 의식 상태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갈등은 하버마스가 말하는 소통적 합리성이 관철되는 대화상황을 확립함에 의해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념의 세계관적 지향과 사회적 기능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분석이 쌓이게 되면, 이념은 자기절대화를 상실하게 되고, 그만큼 열린 시각으로 상대방 주장의 진실성과 합리성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독일과의 관계 및 국제 학술 교류  

교수님은 한국사회학회와 한독사회학회를 포함한 여러 학술 기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한국과 독일 간 학술 교류를 촉진하는 데 있어 가장 보람 있었던 경험은 무엇인가요?

과거 90년대에는 정기적인 교환 프로그램이 작동하여 양국 사회학자들이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발표하고 토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학자들이 뉘른베르크에 머물면서 며칠동안 독일 학자들과 활발한 발표와 토론을 가졌고 회의 후 모두 함께 버스에 동승하여 동독의 할레와 바이마르 등지를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독일 학자들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머물면서 함께 활발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실로 양국간의 학술교류의 진가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수년간 이어져온 교환 프로그램이 2000년대에 들어와 재정지원이 끊어짐에 따라 중단되었습니다. 많이 아쉽습니다

 

이후 저는 저의 제2의 고향이라 할 독일의 대학에서 발표할 기회를 모색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에서 기회를 수차례 가졌습니다. 한국의 성공적 발전에 유교전통이 본질적으로 기여했다는 저의 주장이 독일 사회학자들 사이에 조금이나마 경청 될 수 있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많은 관심있는 시민들이 토론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성공적 발전에 독일 시민들의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발표가 놓친 부분이나 미흡한 부분에 대해 독일 교수가 토론을 통해 친절하게 보완점을 시사해주어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또 저는 학회장으로서 독일 학자들이 한국에서 발표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데 애썼습니다. 이들의발표를 통해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독일학자들은 적절한 개념화를 통해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을 보이는 것에 감탄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또 독일 사회학의 최근 흐름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었고, 새로운 연구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한독사회학자들 간의 학문공동체가 형성되고 우의를 돈독히 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낍니다

 

교수님은 독일 통일과 사회 통합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하셨습니다. 독일의 통일 경험이 한국 통일 과정에서 어떤 교훈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특히, 두 나라의 통합 과정에서 사회적 통합의 측면에서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근년에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바이마르 등 동독 지역을 두루 여행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 여행에서 독일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통일 직후에 보였던 황폐한 모습은 말끔히 사라지고 왕년의 아름다운 모습이 복구되는 기적을 보며, 우리의 경우와 자꾸만 비교되었습니다. 어떤 철없는 자의 방화로 어처구니없게 불타버린 숭례문을 복원하는 데 보여진 온갖 무능과 비교됩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동독 지역의 고속도로, 철도, 통신망 등 인프라 재건을 위해 엄청난 천문학적 금액이 투입되었지만, 횡령이나 비리의 스캔들 없이 재건 사업이 깨끗이 실행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경우 방탄복, 잠수함, 헬기 등 첨단무기 관련하여 벌어진 각종 방위사업 비리와 자꾸만 비교되었습니다. 독일 같은 신뢰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한국의 시급한 사회통합 과제라 하겠습니다

 

독일은 통일과 함께 한가지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통일은 되었지만 동-서독이 하나로 된 것은 아니다는 것이 독일에서 나오고 있는 사회학적 결산의 일반적 논조인 것으로 보입니다. 동독인들은 스스로 ‘2등국민또는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다고 느끼고, 과거 동독 공산체제에 대한 향수마저 강하게 표현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봅니다. 또 동독과 서독의 주민들이 현재의 당면한 사회문제에 대해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서로에 대해 부정적 편견이 시간이 지나도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고 많은 연구들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지난 40년 이상 극히 상이한, 더욱이 대립적인 체계발전을 보였던 동독과 서독은 외적, 헌법적 통일은 달성하였지만 그러나 내적 통일은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적 문화적 언어적 공통성의 저수지만으로는 내적 통일이 달성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한국통일을 생각할 때 이 점이 중요한 과제로 제기될 것입니다

 

한국과 독일의 사회통합을 비교해보면, 극심한 불평등과 배제의 구조로 인해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한국의 사회통합은 튼튼한 균등적 구조 위에 기반하고 있는 독일의 사회통합과 대조를 이룹니다. 현재 한국은 남북한 간의 갈등 못지 않게 남한 내부의 갈등도 매우 심각합니다. 특히 진보-보수 간의 이념갈등이 첨예화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수구꼴통과 좌익 빨갱이간의 투쟁이지요. 서로 간에 불신과 증오가 갈수록 증폭되고 있어 한국은 지난한 사회통합 과제에 당면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 통합과 새로운 위험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셨습니다. 독일과 한국이 직면한 사회 통합 문제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독일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난민과 이민자들이 독일로 몰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봉착한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몰려드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일 것입니다. 독일연방통계청에 의하면 2015년 한해에만 독일에 들어온 난민이 110만명에 이르렀고, 이주민은 213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통일 직후인 1992년에 이주민이 150만명에 달한 이래 최고 수치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2015년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이민 배경 가진 사람이 1700만명에 달하여 전체 인구의 21%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 비율이 계속 증가하여 2023년에는 이민 배경 가진 사람이 2,490만명에 달하여 전체인구의 29.7%를 차지하고, 20세 미만의 아동 및 청소년의 경우 그 비율이 42.2%로 올라갑니다

 

세계 난민과 이민의 쇄도는 독일의 사회적 정서를 매우 음산하게 바꾸었다고 보입니다. 이슬람 배척을 노골적으로 표방하는 극우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대두하고 난민숙소를 방화, 습격하는 사건들이 끊이지 않으며, 테러가 전국 곳곳에 발생하여 사회불안이 만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인에게 2016년은 실로 불안의 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난민이 기록적으로 쇄도했던 때에 즈음하여 실시된 한 조사에 의하면, 독일인들 4명 중 3(73%)이 테러 공격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고, 정치적 극단주의를 불안해하는 시민도 68%나 되었고, 그리고 외국인의 쇄도로 독일인과 독일에 살고 있는 외국인 간에 일어날 긴장을 불안해하는 시민도 67%나 되었습니다 (R+V-Studie, “Die Ängste der Deutschen“ 2016). 2024년 조사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불안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1위의 불안은 생계비 상승(57%)이었고, 2위는 과도한 난민 수(56%), 3위는 주거비 상승(52%), 4위는 외국인 유입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긴장(51%)이었습니다. (R+V-Studie, “Die Ängste der Deutschen“ 2016, 2024). 그렇지만 독일시민들은 여전히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불안을 강하게 갖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최근 한국사회가 급격한 변혁기에 처하면서 한국인들에게 독일이 새삼 주목되고 있습니다. 독일은 세계의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중단없이 경제성장을 보이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일본이 경제위기에 빠져 허덕였고 지금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데 비해, 독일은 세계경제가 위기로 치달았던 2007년과 2008년에 세계 1위의 수출 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오늘에는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의 경제대국입니다. 또한 독일은 매년 발표되는 주요 사회지표에서 세계의 선두를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의 부패인식지수’, ‘국경없는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의 언론자유지수’. 그리고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의 글로벌 성격차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에서 독일은 주요 경쟁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독일이 주목받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사회 정의와 사회 안전을 국가의 기본 의무로 하는 사회국가를 모범적으로 실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소득불평등이 증대하여 사회적 응집이 매우 위태로운 상태에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독일 내에서 커지고 있지만, 독일의 불평등은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하면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한국은 소득 양극화가 매우 심한 나라입니다최상위 10%의 평균소득과 최하위 10%의 평균소득의 배율이 2012년에 6.2였는데점차 감소하여 2015년에 5.7로 내려갔고 2020년에는 4.7이었다독일은 2012년에 3.5였는데 약간 증가하여 2020년에 3.9이었다한국은 소득 양극화가 약간 둔화되기 하였지만 독일과 비교해 매우 높습니다

한국의 빈곤율은 OECD국가들 중에서 매우 높은 편에 속합니다. 여기서 빈곤율은 소득이 빈곤선 이하로 내려가 있는 인구의 비율을 말합니다빈곤선이란 전체 인구의 중위 가구소득의 절반을 말합니다. 2012년에 한국은 18.3%이었고독일은 8.4%였습니다한국은 감소하고 독일은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2020년에 한국은 15.1%이고 독일은 11.6%입니다

특히 한국의 노령인구 빈곤율이 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합니다. 66 이상의 은퇴노령인구의 빈곤율이 2012년에 한국은 47%에 달했고 독일은 9.4%였습니다노령빈곤율이 가장 낮은 나라는 헝가리로 1.8%였고다음으로는 네덜란드 2.2%였습니다. 2020년에 한국은 약간 감소하여 40.5%로 내려갔지만 여전히 매우 높습니다독일은 14.1%로 증가했습니다

따라서 한국사회는 사회통합의 사회적 기초가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다고 진단된다한국의 사회통합은 무엇보다도 불평등 구조의 해소를 으뜸 과제로 갖고 있습니다.

사회통합의 또 하나의 측면은 다문화주의입니다다문화주의에서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한국인은 이주민에 대해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견지하면서도 종전의 동화주의에서 벗어나 보편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다문화주의가 상당히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다고 말할  있다그렇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한국인은 결혼이민자와 이주민을 출신국의 경제발전수준 혹은 문화자본으로서의 가치에 따라 차등화하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저개발 출신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이나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많고반대로 선진국 출신은 차별경험이 매우 적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에 비해 독일의 다문화주의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독일은 일찍부터 외국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다문화 사회를 형성하였고최근에는 유럽인들이 취업을 위해 가장 많이 몰려들어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이민국가가 되었습니다그러나 다문화주의는 실패했다고 선언될 정도로 뿌리내리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독일에서 다문화주의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독일인에게 강인 하게 견지되고 있는 두가지 전통적 태도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하나는 이주민들에게 독일의 생활양식에 적응할 것을 요구하는 ‘동화주의이고다른 하나는 외국인 적대입니다

다문화주의의 면에서 한국과 독일은 상반된 경향을 보입니다한국인은 극심한 불평등 구조 위에서 동화주의에 반대하는데 비해독일인은 튼튼한 균등적 구조 위에서 동화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불평등 사회로 인식되는 한국사회에서는 외국인 이주민에게 동화를 요구할만한 내적 동력이 미약한데 비해내적 동력이 충만한 독일에서는 오히려 동화주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 하겠습니다여기서 내적 동력이란 민주주의와 사회적 균등의 충실을 의미합니다


독일과의 학술적 교류 및 글로벌 시각

독일 프랑크푸르트(Goethe)대학교와 Heidelberg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시며 유교와 한국 사회의 성공을     주제로 발표하셨습니다. 이러한 국제적인 강의 경험이 다른 문화에서 사회 경제 발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고소득 국가는 서유럽과 북유럽 그리고 북미의 나라들입니다. 이 나라들은 종교별로 보면 대체로 개신교 국가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와 경제발전 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루터와 칼뱅의 개신교에서 확립된 금욕적 노동과 직업 개념이 근대자본주의 정신과 친화성을 가졌다고 분석했습니다.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세계종교들,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 등은 근대자본주의 정신의 함양을 저지하기만 했다고 보았습니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테제는 후에 근대화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서구 이외의 다른 나라들, 후진적인 국가들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속히 전통적인 토착문화를 탈피하고 서구 개신교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베버는 『유교와 도교』(1915)에서 일찍이 상업이 고도로 발달한 중국에서 근대자본주의가 발생하지 못한 것은 유교 때문이라고 보는 유교테제를 주장했습니다. 유교는 주술적 마술 정원, 실천적 합리주의, 문학적 교육주의, 가족주의적 효성의 네가지 특성으로 인해 근대자본주의의 발생을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베버 이래 동아시아의 경제적 저발전과 유교 사이에는 친화성이 널리 인정되고 수용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동아시아의 역사는 이러한 베버의 관점을 반박합니다. 한국, 중국, 일본은 급속한 산업화와 눈부신 경제성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북한입니다). 이 지역에서의 경제적 성공의 원인을 이곳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유교에서 찾는 시각이 합리적이라 할 것입니다. 이에 나는 베버가 장애요인으로 보았던 유교 특성들이 오히려 발전의 촉진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논증하고자 애썼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도 하이델베르크에서도 콜로키움에 참석한 시민들은 이런 저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체로 동의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됩니다. 왜 특정한 문화적 요인이 이전에는 발전을 저해하였는데, 이후에는 발전을 촉진하는가? 이는 전통적 사회의 제도적 틀을 파괴한 정치적 격변과 제도적 개혁이 전통적 사회에서는 질식되었던 발전의 충동을 풀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문화가 발전을 방해하느냐 촉진하느냐는 사회구조적 조건에 좌우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발전을 순전히 문화요인에 의해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역설했습니다


유교와 한국의 성공을 주제로 연구하셨습니다.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독일의 철학적     전통과 유교적 가치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융합되거나 대조되는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마르크스는 현대 자본주의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보편적 범주로서 “노골적인 이기심”과 “현금 계산”을 고양시키고, 윤리적 및 종교적 열정마저 “이기적 타산의 차디찬 얼음물 속에” 던져버릴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마르크스의 통찰을 이어받아 베버도 근대 자본주의를 “합리적 질서의 차디찬 해골 손”이라고 특징지었습니다. 하버마스는 언어적 상호이해에 기초한 생활세계가 화폐와 권력의 체계 명령에 복종하게 되는 ‘내적 식민화’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리를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 이후의 현대 사회학의 통찰에 따르면, 유교적 전통문화는 자본주의 발전의 과정에서 존립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근대 자본주의는 이기적 타산과 도구적 합리성에 의거하지 않는 일체의 의식과 행동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됩니다. 세계화 물결 속에 자본주의적 발전을 고도로 성취하고 있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유교 전통은 쇠퇴하였는가?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유교 사회라고 불릴 수 없는가? 경험적 연구는 전통적 유교 예절과 유교적 가치관이 여전히 대부분의 한국인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급속한 산업화의 결과 유교가 사회적 표면에서는 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일상생활의 규범 원리로서 현대 한국인에게 여전히 지배적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글로벌 자본주의 물결과 유교 전통은 양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 한국인의 일상생활이 유교 전통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성과 연령에 관계없이 여전히 강력한 유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한국인의 유교심성은 여성차별과 같은 전근대적 성차별을 배척하는 근대적인 민주적 심성이라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교 자본주의‘, ‚유교민주주의가 말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봉건적 사회주의에 가까운 북한은 유교사회주의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정책 자문 활동과 정부의 역할

교수님은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와 통일부     정책자문위원회 등 다양한 정부 기관에서 자문을 해 오셨습니다. 교수님의 학문적 작업이 이러한 자문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사회학의 관점에서 정부 정책에 어떤 통찰을 제공하셨나요?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에서 북한 급변사태시 남북한 사회통합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중요 현안과제로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하버마스가 사회통합과 체계통합을 구분한 것에 착안하여 남북한 사회통합을 과정과 단계별로 구상했습니다. 위원회의 추진사업 일환으로 베트남에 출장가서 통일과정에서 월남 지식인과 교사들을 어떻게 통합해갔는지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정책보고서를 완성하여 제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이 교체되어 캐비닛 속에 사장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보고서를 학술논문으로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통일부 정책자문위원으로서 통일교육의 방향과 내용의 설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됩니다


사회학이 공공 정책 형성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특히 통일, 국가 정체성, 사회 복지 등의 분야에서 사회학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통일>

남북통일에 대해서는 외적 통일에만 치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적 통일도 기해야 합니다. 내적통일을 위해서는 ‘사회국가’가 확립되고 ‘인정의 정치’가 펼쳐져야 합니다. 여기서 ‘사회국가’란 시장경제의 질서 안에서 ‘사회정의’를 진흥시킬 의무를 국가가 지는 것을 말하며, 사회적 불평등에 따른 국민의 정치적 분열을 방지하고, 남북의 지역 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 요구됩니다. ‘인정의 정치’란 상이한 가치관과 문화를 가진 소수자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을 말하며, 통일 후에 북한주민들이 경험할 ‘기형화’와 ‘탈가치화’의 ‘비대칭적 인정’을 타파하는 것이 핵심적 과제로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북한주민들이 통일한국에 대해 동일시를 거부하고 저항적 지역정체성으로서 북한 정체성이 형성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북한 정체성은 오랜 세월의 북한 사회화에 그 원인이 있을 수 있고, 또 통일 후 북한 주민이 겪을 생활상황의 경험 때문에 발생할 수 있습니다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먼저 통일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편견 없는 접근을 어렵게 하는 이념의 뇌옥으로부터 해방되어 하고, 다른 하나는 남북 간에 사회학 교류가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남북 간의 사회학 교류는 남북한사회에 대한 상호이해를 증진시킴으로써 남북의 사회통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한국인의 정신적 지평이 더 이상 분단된 나라의 국경에 가두어지지 않고 세계로 확장됨에 따라 통일에 반대하고 현재의 분단 상태의 유지를 바라는 ‘공존주의’가 오늘의 한국인에게 지배적인 통일의식 유형으로 자리잡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통일정책이 수립되어야 하겠습니다

 

<국가정체성>

민주적 사회국가로 국가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민주적이란 개인의 인권과 존엄을 국가권력이 침해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인정하고, 성평등을 모든 분야에서 관철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국가란 사회적 불평등에 따른 국민의 정치적 분열을 방지하고, 남북의 지역 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 요구됩니다. 사회국가는 두가지 기본의무를 집니다. 사회적 약자와 강자 간의 격차를 가능한 한 감소시키는 사회적 균등의 의무를 지며, 또한 교육제도, 의료제도 등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의 적합한 조치를 통해 국민의 생존기초를 일반적으로 보장하고 진흥하는 사회적 안전의 의무를 집니다

사회국가는 시장원리에 기초하면서도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구별되고, 동유럽의 몰락한 국가사회주의 체제와도 다른 제3의 사회체제라고 할 것입니다. 독일은 기본법에서 국가정체성으로서 사회국가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복지>

사회국가를 실현하는 사회 안전과 사회 균등의 정책이 교육, 직업, 주택, 양육, 의료, 돌봄, 노령빈곤, 성평등, 노동, 휴가, 실업수당, 가사 등 각 분야에서 펼쳐져야 하겠습니다. 독일의 사회국가적 정책들이 많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교수님의 업적과 미래 비전  

교수님께서는 한국과 독일 간의 학술 교류를 촉진하는     데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학문적 여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여라고 생각하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이론적으로는 저서 <지식사회학>을 출간하여 우리 학계에 지배, 이데올로기, 지식인에 관한 논의 지평을 확립하고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성공 - 민주화와 경제발전 - 이 유교전통에 힘입은 것이라는 주장을 입론하고 증명하여 유교자본주의론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실천적으로는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학과 강의를 통해 많은 젊은 학생들에게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인 것이 중요한 기여였다고 생각합니다

   

2025 ADeKo Award 수상자로서, 젊은 학자들이나 미래의 사회학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신가요?

현대의 상품물신주의 풍토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이 돈과 권력의 외적 기준을 갖고 사람을 평가하더라도, 학자는 지적 성실성의 내적 기준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의 부조리에 휩쓸리기를 거부하고 끈기와 엄격함과 냉정함을 갖고 정진할 때 즐거운 학문이 펼쳐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성공을 기원하며 항상 응원하겠습니다.